나는 산새처럼 살고 싶다 / 도연 度淵



  도연(2011-11-28 00:42:34, Hit : 3703, Vote :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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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판에는 새들로 가득하고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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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는 새들로 가득하고 나는 행복하다.

냉정리 저수지에 도래했던 노랑부리저어새는 세 마리가 남아 일주일을
더 머물다가 떠났다. 나그네가 떠난 자리는 백로와 흰뺨검둥오리와 청둥오리가
고기잡이를 하거나 자맥질에 열중이다. 며칠 전에는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더니
어제 오늘은 포근한 날씨에 비까지 촉촉하게 내려 봄이 온 것 같다.  
아침이면 머리 위로 수백 수천의 기러기가 줄지어 오가고 들판 곳곳
발길 닿는 곳마다 새들이 가득하다. 때로는 고즈넉하고 때로는 전설같은
풍경을 혼자 보는 게 아까워 손님이 오면 들판을 한 바퀴 도는 게
일과가 되었다.
  
섬진강 대나무는 일부를 화분에 심어 따뜻한 공양간으로 옮겼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줄기가 해마다 얼어 죽는 게 늘 미안했던 터다.
영하 25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에 삶을 포기할 만도 할 텐데
섬진강 대나무는 언젠가는 신록처럼 푸른 날이 있으리라는 신념으로 10년 넘게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전기장판 하나로 지낼 때는 실내 기온이 한데나 다름이 없어 화분 하나 들여놓을 수
없었지만 연탄보일러 덕분에 화분을 들여놓아도 냉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같은 야생동물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멍멍이 똘이는 벌써부터 야생동물 오가는 기척을 놓치지 않고
짖어대거나 쫓아내기에 바쁘다. 비둘기나 어치, 까치, 까마귀가 먹이에 접근하는
것도 눈뜨고 못 본다. 어린 고라니 한 마리는 먼발치에서 기웃거리다가
돌아가고 콩새와 되새, 지빠귀 등 겨울새들은 부산스러운 멍멍이 똘이 때문에
감히 얼씬도 하지 못한다.
녀석은 날이 갈수록 '고요하고 고요한 나의 비밀의 정원'을 안팎으로 정신사납게
뒤흔들어 나의 사색의 맥을 뚝뚝 끊어놓는다. 벌써부터 퇴출시키려고 작정했지만
이곳보다 더 행복한 곳이 또 있을까 싶은 노파심에 간단히 결행에 옮기지 못했다.
결국 녀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마을로 퇴출시키기로 결정했다.
딴 데 가더라도 아프지 말고 잘 살라고 많이 쓰다듬어 주었는데
눈치를 챘는지 녀석은 밤새 한 번도 짖지 않았다.
오늘 아침 멍멍이는 이삿짐을 쌌다.
먹다 남은 사료와 밥그릇 하나, 장난감 하나로 철저한 무소유 자체다.
그래도 집은 한 채 가져갔으니 위안이 되었으리라.

불편한 공존은 새들이 먼저 안다.
앞마당과 창문밖에 고요가 다시 찾아들자 멧새와 노랑턱멧새와 딱새가
내려앉았다. 하루 이틀만 더 지나면 다람쥐와 청설모가 다시 숨바꼭질을 시작할 테고
너구리와 오소리와 고라니도 기웃거리며 드나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멀찌감치 땅콩을 물어가던 어치가 창문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다. 밤이 되자 오소리가 등장했다. 과일껍데기나 음식물 찌꺼기를
먹으러 온 건데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나 된다.
연탄불을 갈러 무심코 문을 열었다가 괜히 녀석들 식사시간만 방해를 했다.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반짝이는 불빛 네 개가 선명하다. 멀리 가지 않고
내가 볼일을 마치고 들어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뒤쪽에는 너구리가 등장했다.
해코지 않는다는 걸 아는 녀석은 능청맞게 어슬렁거리며 몸을 숨긴다.
멍멍이 똘이의 부재가 서운했는데 빈자리를 다른 녀석들이 채워준 것이다.
잃을 것도 얻는 것도 없다더니 정말 그렇다.  

티비 코미디 프로그램에 ‘감사합니다’라는 코너가 있다.
야동 보려고 아버지의 주민번호를 입력했더니 아버지는 이미 우수회원이었다는,
그래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익살을 떤다.
감사와 행복은 서로 닮은꼴이다.
감사한 일이기는 한데 그게 반드시 행복한 일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그러나 뒤집어 보면 행복한 일이 곧 감사한 일이
아닐까 싶다.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불행한 일은 아니다. 행복과 감사가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과 달리 행복과 불행은 완충지대 없이 서로 등을 진 모습이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 또는 행복한 걸 모른다고 하면 곧 불행하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순간순간 나는 행복하다.
연탄 한 장으로 따뜻한 잠자리를 얻을 수 있으니 행복하고
미끄러운 눈길에 힘겹게 물지게를 지고 다니지 않게 되었으니 행복하다.
거기다가 법당 마루 끝에 걸터앉아 흙바닥에서 밥을 먹지 않아도 좋으니
어찌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어 행복하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두 귀가 있어 행복하고
갈참나무 숲을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어 행복하고
숨을 쉬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그대는 무엇으로 행복하신가.

* 지난 주에는 BBS 불교방송에 다녀왔다.
새로 나온 책 <나는 산새처럼 살고 싶다>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11월 22일 <아름다운 초대>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
방송시간 약 40 분.

http://www.bbsi.co.kr/

사진 / 물고기처럼 나는 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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