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새처럼 살고 싶다 / 도연 度淵



  도연(2011-12-13 09:05:46, Hit : 3306, Vote : 797
 산사랑 원고 /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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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무엇을 소망하십니까.

새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수은주가 연일 영하10도에 머물고 눈까지 내리자 하나둘 새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눈 속에서 먹이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디어디 가면 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이 온 숲에 퍼졌을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견과류 파는 '산과 들'에서 상품성이 떨어지는 땅콩을 한 트럭분이나
보내와 연탄 1천 장을 들여놓은 것만큼이나 넉넉합니다.  
작은새들이 모여들자 한 덩치 하는 녀석들도 모여듭니다.
여러 마리의 어치, 서른 마리쯤의 멧비둘기, 또 서른 마리쯤의 까치와 까마귀까지 아침이면
앞마당은 북새통을 이룹니다. 이들은 땅콩을 한 번에 몇 개씩 꿀꺽꿀꺽 삼키는
대식가입니다. 새들은 먹이를 저장하는 습성이 있어서 내년 봄에는 온 숲이 땅콩밭이
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말똥가리와 새매, 황조롱이가 지상에서 무슨 잔치라도 벌어졌을까 싶어
빙글빙글 선회하고 있습니다. 어느 새 멧비둘기 한 마리가 매에게 희생되었고 황조롱이는
사냥한 들쥐를 물고 전봇대 꼭대기에 앉아 식사중입니다.
새매는 참새, 멧새, 붉은머리오목눈이 같은 작은 새들을 사냥하느라 덤불숲을
분주하게 드나듭니다. 새매가 덤불숲을 뒤지며 사냥하는 것도 처음 목격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소득은 별로인 거 같습니다. 까치와 까마귀, 직박구리가
내지르는 요란한 경보음을 들은 작은새들은 미리미리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땅콩은 새들만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들쥐, 너구리, 오소리, 고라니, 멧돼지도
좋아하고 들고양이까지 끼어들어 먹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들은 어슬렁거리며 먹이터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밤마다 손전등을
들고 어떤 녀석들이 오가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손전등 불빛에
반사된 눈빛의 높이로 녀석들의 이름도 알 수 있습니다. 지면과 납작하게 붙어있는 눈빛은
고양이이고 지면에서 조금 떨어진 눈빛은 너구리나 오소리이며 지면에서
높이 떠다니는 눈빛은 고라니라고 보면 맞습니다. 녀석들은 손전등 불빛에
익숙해져 잘 달아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환한 불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빛에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아직까지 사냥하는 인간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냉정리 저수지도 꽁꽁 얼어 설원이 되었습니다.
저어새, 노랑부리저어새, 기러기,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논병아리, 민물가마우지,
백로, 왜가리들이 시장통처럼 바글거렸는데 얼음이 언 후 거짓말처럼 고요합니다.
얼음이 얼면 먹이를 구할 수도 없고 헤엄을 치고 놀 수도 없어서 얼음이
얼지 않는 곳을 찾아 모두 떠난 것입니다. 가끔은 철모르는 어린 녀석들이
얼음판 위에 어깨를 움츠리고 옹기종기 앉아있지만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들고양이나 삵,
너구리가 가만두지 않습니다. 이래저래 날씨가 추워지면 새들만 고생입니다.

따뜻한 방으로 자리를 옮긴 섬진강 대나무는 키가 훌쩍 자라 150cm나 되었습니다.
겨울이면 줄기가 얼어죽으면서도 언젠가는 하늘을 찌를 듯 자랄 날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나무만 그런 게 아닙니다.
들풀은 발길에 밟히고 칼날에 베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면 금방 무성한 숲을 이룹니다.
토끼장에 갇혀 사는 집토끼는 평생 땅을 밟을 기회를 기약할 수 없지만 미래를 위해
굴을 팔 수 있는 튼튼한 발톱을 자자손손 물려줍니다. 양계장의 닭도 끊임없이 무정란을
낳습니다. 구제역 전염병이 돌아 모두 매몰처리된 축사에도 다시 가축이 들어왔습니다.
돼지도 소도 목숨 바쳐 새끼를 낳는 일에 몰두합니다.
들판의 수 많은 기러기도 먼길을 마다않고 날아옵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은 가끔 희망을 포기합니다.

돼지농장에서 일하는 '산타'는 멀리 스리랑카에서 왔습니다. 우리 나이로 마흔 아홉 살
입니다. 쉬는 날이면 차를 마시러 오는데 깨끗이 씻고 말쑥하게 차려입었지만
몸에 밴 지독한 돼지냄새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타에게서 나는 냄새는
희망을 가득 품은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부끄러운 냄새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몸에서 나는 냄새도 지독하지만 입을 통해 나오는 '말'에도 냄새가 지독합니다.
몸도 마음도 부패한 까닭입니다.
냄새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비정상적인 희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남의 것을 거저 빼앗으려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망상입니다.
마을에 내려가면 '스님, 여기 좀 앉아보시라' 고 소매를 잡아끕니다.
내년 신수 좀 봐달라는 건데 열심히 사는 사람은 이런 망상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사는 데 열중하고 매사에 준비하고 있으면 내년 신수는 운수대통이요
아들 딸 취직이나 시집 장가 걱정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못이기는 체 얘기를
들어보면 희망도 준비도 없이 사는 게 허술합니다. 여기저기 물이 줄줄 새고
있습니다.

조촐한 저녁식사 모임에서 덕담 한 마디를 요구합니다.
나는 덕담을 해주는 대신 나의 새해 소망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새해에는 속이
더 튼실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속이 튼실하지 못하면 언제 트로이의 목마가
침입해 나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릴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바깥으로만 치장하는 것도 속이 튼실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점에 가면 어마어마한 생각의 흔적들이 쌓여있습니다. 그런 것을 목도할 때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나는 부끄럽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 또 부끄럽습니다. 저 양반, 나보다 몇 살
더 먹지 않았는데 여전히 공부를 참 많이 하는구나 싶어서입니다.
그가 논어와 맹자를 잘 알아서가 아닙니다.
나는 저이처럼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행사장 한켠에 양계장 주인이 직접 계란을 팔고 있었는데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누군가 무정란을 찾는 것입니다. 대개는 유정란을 찾기 마련이지만
손님이 무정란을 찾는 바람에 양계장 주인은 뜨악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무정란은 나를 위한 거였습니다.    
점심공양으로 이런저런 음식은 어떠냐고 묻는 것도 나를 위한 배려입니다.
주남저수지 행사에 내려갔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새들과 들판의 두루미는 어떻게 하고
왔느냐고 합니다. 이 모두가 나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나는 서둘러 내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새삼스럽게 나는 '동안거'에 듭니다.
산에 홀로 살면 적막할 거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가는 사람들과 차 마시랴 얘기 들어주랴 낮시간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도 모자라 경조사를 비롯한 갖가지 행사에 나가봐야 합니다. 나도 행사를
치뤘으니 품아시를 해야 할 테고 산에 사는 것도 사람 사는 일이라 마냥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해가 져야 비로소 책이라도 한 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난 한 해도 여늬 사람들과 다름없이 분주하고 끄달리며 살았습니다.

제주도에 잠시 내려와 있는데 한림공원에 아름드리 야자수가 하늘을 찌를 듯
줄지어 서있습니다. 모두 40년 전에 심은 거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묘목을 심으면 내 나이 100살이나 되어야 볼 수 있는 나무들입니다.
꿈 같은 얘기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40년 후 누군가는 나처럼 경이롭게 나무를
쳐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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