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새처럼 살고 싶다 / 도연 度淵



  도연(2011-12-29 19:27:29, Hit : 3661, Vote :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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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이 먹는 멧돼지들


.
눈이 내리니 야생동물들의 발자국이 어지럽다.

산타가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상자 속에서는 한 뼘 크기의 하얀색 불상이
나왔다. 스리랑카에서 산타의 아버지가 '스님 선물'이라며 보내온 것인데
스리랑카 사람을 꼭 닮았다.
불상을 만드는 사람을 불모라고 한다.
태국 불상은 태국 사람을 닮았고 티벳 불상은 티벳 사람을 닮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상만은 유독 국적불명이다.
비만에 가까운 두루뭉수리하고 넉넉한 풍채는 아무리 뜯어보아도 우리와
닮지 않았다. 아마 상상 속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빚은 불상일 것이다.
산타네는 장수가족이다. 할아버지가 115세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현재 98세라고 한다.
불상은 산타 아버지가 내게 선물한 거라고 하지만 실은 머나먼 타향에서
일하는 아들의 무사귀향을 기원하는 의미가 더 컸을 것이다.    

추운 날씨 때문에 들판의 두루미도 잔뜩 움츠렸다. 그렇다고 먹이활동까지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맹수나 맹금류는 한 번 배를 채우면 며칠 씩 먹지 않고도
견딜 수 있지만 식물성을 주식으로 하는 새들은 거의 하루 종일 먹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서식지가 습지인 두루미는 습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목과 다리가 길게 진화했다.
식성도 까치나 까마귀처럼 잡식성이어서 물고기와 개구리 등 못 먹는 게 없다.
그러나 모든 게 꽁꽁 얼어붙는 겨울철 철원평야에 두루미가 먹을 수 있는 건
들판의 낙곡 뿐이다. 식물성 먹이를 통해 단백질을 얻기 위해서는
식사량이 많아야 한다. 몸무게가 5~7kg이나 나가는 대형조류인 두루미는
그래서 하루 종일 먹어야 살 수 있다. 들판에 떨어진 낙곡이 모두 두루미 차지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수십 만 마리의 기러기까지 먹이경쟁에 뛰어들기 때문에
두루미 차지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사람들이 등장하면
먹이활동을 중단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래저래 겨울철 들판을 찾는
두루미의 삶은 고달프다.

야생동물도 겨울이 되면 살아가기가 만만찮다.  
땅이 얼어 칡뿌리 하나 캐먹기 쉽지 않은데 그나마 양지쪽에 먹이가 될 만한 것은
벌써부터 동이 났다. 숲속 곳곳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한 흔적이 자주 눈에 띈다.
눈이 쌓이면 마시는 물은 해결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물 한 모금 마시기 위해
목숨 걸고 큰 길을 건너 개천까지 내려와야 한다. 겨울철 개천 모래밭에는
무수한 야생동물의 발자국이 어지러운 것도 그런 까닭이다.  
밤마다 내려오는 다섯 마리의 멧돼지는 마치 점령군처럼 앞뜰과 뒤뜰을
종횡무진 오가며 먹을 것을 찾는다. 옥수수 사료 한 포대를 놓아주면 게눈 감추듯
사라진다. 먹성 좋은 녀석들에게 간식밖에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다섯 마리나
되는 녀석들을 모두 먹여 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녀석들이 등장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초저녁에 오기도 하고 한 밤중에 나 모르게 다녀가기도 하는데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위험도를 줄이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나는 녀석들이 보고 싶어 수시로 밖을 내다본다.
왔겠지 하고 조심조심 내다보면 없고, 없겠지 하고 무심히 문을 열고
나가면 녀석들은 어느 새 와 있다. 어떤 날은 녀석들이 돌아갈 때를 기다리다가
연탄불을 갈지 못해 꺼트린 적도 있다.  
산에는 오솔길이 두 갈래로 나 있다. 하나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고 하나는 야생동물이
다니는 길이다. 동물이 다니는 길은 반드시 사람이 다니는 길 위쪽에 있다.
동물들의 가장 큰 천적은 사람이어서 높은 곳에서 사람을 먼저 발견하고 피하려는
의도이다. 뒷산 골짜기 산책길 일부가 지난 여름 폭우로 유실되었다.
할 수 없이 야생동물의 다니던 길을 이용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앞으로 뒤로
너구리며 오소리며 고라니며 멧돼지가 오고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따금 깡충깡충 뛰는 산토끼도 보인다. 분주히 오간 발자국, 군데군데 눈에 띄는
녀석들의 배설물, 무엇을 찾으려고 했는지 파헤쳐 놓은 흔적들이
나를 그런 상상으로 이끈다.  
아름드리 소나무 밑동은 오랜 세월 멧돼지가 비벼대 깊게 속살이 드러났다.
가려운 곳을 긁어대고 영역도 표시하려는 멧돼지의 치밀한 속셈이다.  
나는 상상 속에서 깨어 얼른 그들의 길에서 벗어났다. 동물들 영역에 인간이
끼어드는 건 동물들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눈雪 타령을 했더니 오후부터 내리던 눈이 어두워질 때까지 내려 제법 쌓였다.
눈이 내려야 녀석들의 존재가 확연히 드러난다.  
먹이통 주변에는 멧돼지와 고라니와 너구리 발자국으로 어지럽다.
너구리 한 마리는 평상 밑에서 쉬다가 갔다. 고양이는 뭐 먹을 게 없나 하고
먼발치에서만 오갔다. 들쥐들도 종종걸음으로 드나들었다.  
멧돼지와 고라니 발자국은 혼동되기 쉬운데 멧돼지 발자국은 투박하고
고라니 발자국은 깔끔하고 날렵하여 금방 가려낼 수 있다.
눈에 찍힌 녀석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돌아보니 커다란 내 발자국은
마치 폭력배 같다. 새발자국이나 고라니, 너구리 발자국은 얼마나 단정하고
순수한가. 거기에 내 발자국은 함부로 쿡쿡 찍혔다. 걸음걸이나 발자국만으로도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더니 앙증맞은 야생동물 발자국 위에 거칠게 찍힌
내 발자국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다.  
그래서 서산대사께서는 이렇게 일렀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蹟)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걷는 길이 훗날 뒷사람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참 많이도 기웃거렸다.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이게 옳을까 저게 옳을까,
이리 갈까 아니면 저리 갈까, 이곳에 머물까 저곳에 머물까,
이걸 가질까 저걸 놓을까, 등등
안팎의 다양한 생각과 인연으로 갈팡질팡할 때가 적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꿈을 꾸고 꿈을 이루려 살지만
나이를 먹으면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살게 된다.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 타인에게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문득 '너 자신을 알라’는 말 속에는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엄청난 크기의
빙산의 본질이 숨어있음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촌철살인하는
예리한 비수가 감춰져 있음도 알아챈다.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어야 ‘겨우’ 철이 든다는데, 대체 누가 그렇게 프로그램
해놓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순은 너무 멀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이냐,
철이 든다는 나이까지 살게 되었으니.
    
책방에 책을 주문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저는 누구누구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런데요, 라니.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로 퉁명스럽게 들린다.
--아, 네에. 그러시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이쯤 해야 옳은 거 아닌가?
나는 서점 주인 맞느냐고 확인을 한 후 필요한 책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다고
설명했다. 그제서야 저쪽에서는 아, 네에. 한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소방교와 통화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들었다.
나 김문수 도지산데요, 했으면
아, 그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하는 게 옳은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고리타분한 기성세대인가?
도지사가 소방서 직원에게 권력을 휘두르려고 그랬겠는가 아니면
대접을 받으려고 그랬겠는가. 대화내용을 인터넷에서는 여기저기 퍼나르고
패러디하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째서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마음이 아리다.
내 생각에는 전화를 받은 소방교가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장난전화로 알았다는 것은 직무유기이며 코미디이다. 장난전화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순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철이 들지 않았으니 뭐 괜찮다고
넘어가야할까보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싫거나 미워도 ‘가카 새끼 라면’ 운운하는 것은
심해도 한참 심했다.

어두워지려면 한 시간은 더 지나야 하는데 새들은 잠자리를 찾아
서둘러 돌아갔다. 성급한 고라니도 뜰을 가로질러 뛰어간다. 잠시 후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수리부엉이는 오후 다섯 시 반부터 울기 시작했다.
세상이 이렇게 순리대로 차근차근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얗게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야생동물의 존재가 확연히 드러났다.
눈은 내릴만하다.

사진 / 먹이 먹으러온 멧돼지 다섯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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